양구백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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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르면 전국의 139개 자기소 가운데 강원도 내에는 강릉도호부 1곳, 울진현에 1곳과 함께 양구현에 2곳의 자기소가 있다고 하였으니 양구 현청(縣廳)의 북쪽 ‘건천(乾川)’과 방산의 동쪽 ‘장평(長坪)’이 그곳으로 각각 中品이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양구 현청 북쪽 ‘저을리(貯乙里)’에는 도기소도 있었다고 하였다.
또 중종25년(1530)에 간행된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 토산조에는 전국의 자기 생산지32개소 가운데 강원도로서는 유일하게 양구현만이 명시되어 있다.
앞의 두 내용을 종합해 보면 조선 초 139개소에 달했던 자기소가 16세기 들어 32개소로 축소되었고 그 중에서도 강원특별자치도에서는 유일하게 ‘楊口’만이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5-16세기 양구지역은 도자기 생산의 요지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사료에서 양구는 도자기 이외에도 백토 산지로 기록되고 있다.
숙종27년(1701)의 기록에 ‘楊口土’에 관한 내용이 있고 숙종35년(1709)에도 이전에 양구에서 백토를 채취하였으나 힘들고 고되어 다른지역에서 백토를 옮겨 오도록 하였으나 分院 백자 생산을 책임지던 사옹원에서 양구백토가 아니면 그릇이 몹시 거칠고 흠이 생기게 된다고 하자 다시 양구토를 가져다 쓸 것을 주청하는 대목이 나온다.
숙종39년(1713)에는 양구에서 굴취하던 백토를 다른 지역으로 옮겼으나 역시 폐단이 많아 대책을 논의하는 내용이 보이며, 숙종40년(1714)년에도 ‘양구토’ 굴취가 매우 힘든 奴役(노역)이었음을 보여주는 기사가 있다. 영조 17년(1741)에는 양구에서 백토 캐는 작업의 폐단을 왕이 개선하도록 명하는 대목이 있으며, 영조19년(1743)에는 백성들에게 끼치는 민폐를 덜기 위해 사옹원 분원의 낭관(郎官)을 파견하고 상정미(詳定米)를 나누어 주면서 백토를 캐도록 했던 일을 거론하고 있다.
정조 15년(1791)에는 강원도사 윤치성(尹致性)이 관동지방의 민폐 4조항을 아뢰는데 그 가운데 두 번째 조항에는 양구에서 나는 백점토의 값을 올려주자는 내용이 있다.
이에 왕은 백성을 고통스럽게 하면서 굴취한 양구의 백토가 분원에 와서 사번(私燔)에 사용됨으로써 진상품을 제작하는데 사용되지 못하고 사치한 물건을 만드는데 소용되는 것을 지적하면서 사옹원 감번관(監燔官)을 양구에 배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양구와 관련해서 그동안 역사적으로 가장 관심을 모았던 기록은 금강산에서 발견된 홍무24년(洪武)(1391)명 백자 일괄품에서 보이는 이성계의 발원문이다.
우선 이 백자들은 기타 사리구와 함께 1932년 6월 금강산 방화선 공사시에 금강산 월출봉 석함 내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백자대발 4점과 향로1점, 은제도금탑형사리기, 은제8각 圓堂形龕, 청동완, 은제 귀이개 등이 함께 발견되었다.
특히 백자 대발은 사리 외함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가운데 대발의 외측면과 내측면 그리고 굽 주위에 음각된 명문이 남아 있는데 특히 굽 주변에 새겨진 명문 가운데 ‘方山砂器匠沈龍’라는 구절은 이들 백자의 생산지가 양구일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러나 양구지역은 1910년 일제 통치하에 들어가면서 전통적인 생산방식 대신 근대적인 사기그릇을 제작하였고, 1924년 12월에 조사된 《요업종류별공장조사(窯業種類別工場調査)》에 따르면 양구군 장평리에 1913년 4월에 창립된 ‘도자기개량조합’ 이라는 근대적인 이름을 가지고 사기그릇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특히 장평리 가마는 고려말부터 조선 전후기를 거쳐 20세기 중반까지도 자기 생산을 계속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양구지역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백자를 제작하는 원료인 좋은 질의 백토가 매장되어 있어 조선시대 왕실 관요인 분원에 태토를 공급하는 중요 공급지였다. 원료뿐만 아니라 금강산에서 발원하는 수입천과 풍부한 땔감은 고려시대부터 20세기에 이르기 까지 자체적인 요업 발달을 가능케 한 배경과 원동력이 된다.